중학교에 다닐 때 강경의 여러 곳에서 하숙을 하였다. 강경은 나의 소년 시절을 보낸 곳이라 골목마다 내 삶의 흔적들이 묻어 있다. 그래서 강경은 세상 잡사(雜事)에 지친 나를 따뜻한 포대기로 안고 과거로 돌아가 그 시절의 마음으로 회복시켜 주는 힘이 있다. 마음속의 배터리가 방전되어 힘을 잃었을 때 나는 강경에 가고 싶다.
■ 그때가 좋았는데, 그렇게 좋은 줄 몰랐다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지금도 살고 있는 마을은 참 편안하다. 그런데도 가끔 강경에 가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게 강경은 내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부모님이 계신 집이 그리워 겨울이 지나서 해가 길어지면, 나는 다시 새벽밥을 먹고 먼 길을 걸어 기차통학을 했다. 미운 정이라더니 그렇게 강경과 정이 들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그 여러 하숙집이 모두 좋은 곳이었다. 특히 중학교 때의 황산동(당시는 그렇게 불렀다) 하숙집과 남교동파출소 앞 하숙집이 좋았다. 두 곳 모두 일본식 집이었다. 황산동은 하숙생이 여럿이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매우 사철하여*저녁마다 돌아가며 우리들을 차례로 불러 발을 씻겼다. 음식 솜씨도 좋았다. 다음날 먹을 고등어를 저녁에 지졌는데 부엌에서 그 냄새가 풍기면 그때부터 좋았다. 우리가 더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하려고 노력하신 그 아주머니께 감사드린다. 그때 먹던, 고등어에 무를 넣은 조림은 지금도 좋아한다. 또 남교동 하숙집은 분에 넘치게 좋았다. 그 댁에는 남자아이만 둘이 있었는데 큰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경찰관이던 주인아저씨는 유도 4단으로 경찰서 유도 사범이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아저씨와 어울리지 않게 체격이 작았으나 얼굴에 천사라는 명패를 달고 있는 분이었다. 살림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행실이 착실한 학생을 가까이 두어 그 어린 형제들이 본받게 하려고 하숙생을 들인 것이다. 아는 분의 추천으로 나는 아주 착한 친구 하나를 동반하여 그 댁에 들어갔다. 하숙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엄청난 대우를 받았다. 세끼 밥은 말할 것도 없고 철 따라 각종 과일을 대접(?)받았다. 우리는 하숙생이 아니라 시어머니가 잘 거두라고 신신당부하신 시동생이었다.
■ 그때가 정말 좋았다
어린 시절에 살던 집보다 훨씬 넓고 따뜻한 집에 살고 있다.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음식을 먹고, 추위에 몸을 웅크리고 걷던 길을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비가 와도 옷이 젖지 않으며, 눈보라가 쳐도 걱정이 없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게 호의호식하며 편안하게 산다. 아직도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린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잘사는 나라에 태어나서 때가 되면 정부가 각종 예방접종을 하라고 재촉하기도 한다. 또 어디 특별히 아픈 데가 없어도 미리 건강검진을 하게 해서 있는 줄 모르던 병을 찾아 주기도 한다. 이제 환갑은 어린애고 칠십도 노인이 아니라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는 것만으로 따지자면, 나보다 훨씬 더 고급(?)스럽게 사는 사람도 많지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과연 더 바랄 것 없는 세상인가’라는 질문에는 고개를 젓는다. 무슨 타임머신 같은 것이 있어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1970년대 중반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가 좋았다. 그때 그 시절이 정말 좋았다. 그때는 우선, 내가 젊어서 좋았다. 밤에 늦게까지 무슨 일을 하고 지쳐 잠들어도 이튿날 일어나면 몸이 거뜬했다. 낮에도 피곤하다거나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힘든 일도 두렵지 않았다. 또 아침이면 수건을 들고 집 앞 냇가로 나가 이를 닦고 세수를 했다. 한낮에 더우면 남자들은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후미진 냇물에 가서 멱을 감고, 아낙네들은 밤에 찬물이 솟는 샘에 모여 목욕을 했다. 아침저녁으로 먼 길을 걸어 다니다가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데, 가고 싶은 곳에 빨리 가면서도 길가에 피어 있는 꽃들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통일벼가 생겨서 쌀 생산량이 곱절로 늘어나 배를 곯던 사람들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지금처럼 언론이 우리 삶에 깊이 파고들지 않아서 정치에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었다. 주말에 사람들이 모여 시위하지 않았고, 상인들은 그 때문에 장사가 안돼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지도 않았다. 생활은 그럭저럭 궁색하지 않았고, 마음은 그런대로 편안했고, 세상은 대체로 평온했다. 그때가 좋았다.
* 어떤 일을 스스로 나서서 부지런히 처리하는 태도가 있다(충청도지방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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